제3장

2025년 11월 11일, 기자

밤사이 사라진 것은 한 줄이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그 한 줄이 사라졌다는 사실까지 기록에서 없어져 있었다. 서도윤은 탁자 위에 놓인 두 장의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한 장은 전날 밤 유세프가 보존연구동에서 출력해둔 유물 등록정보였다. 종이 아래쪽에는 분명히 최초 출처 미상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었다. 그 옆에는 임시등록번호와 첫 보관장소도 함께 적혀 있었다. 다른 한 장은 그날 아침 박물관 전산팀이 전달한 감사기록이었다. 감사기록에 따르면 해당 항목은 삭제된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삭제라고 부를 만한 행위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기존 데이터는 통합기록 이관정책에 따라 ‘비활성 유산필드’로 자동 분류되었고, 일반 사용자 화면에서는 숨김 처리되었다. 작업 주체는 시스템의 표준화 모듈이었다. 유세프의 계정이 표시된 것은 그가 해당 유물의 최종 검토자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행정동 단말기에서 접속한 것으로 나타난 것은 서버가 최근 사용된 인증값을 불러온 결과라고 했다.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사용자가 화면을 보고 있는 동안 항목이 사라진 것도, 건물 반대편에서 같은 계정이 접속한 것도, 저장과 인쇄가 동시에 차단된 것도 기술적으로 설명 가능한 일이 되었다. 유세프는 감사기록을 읽은 뒤 종이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보존연구동 옆의 작은 회의실. 창문은 없었고, 형광등의 흰빛이 회색 벽과 금속 탁자 위에 고르게 내려앉아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7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살마 나기브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풀었다.

“인증값이 남아 있으면 다른 단말기에서 같은 사용자명으로 작업이 기록될 수 있습니다.”

“행정동 단말기는 그 시간에 꺼져 있었습니다.”

“전산팀은 원격 유지보수 중이었다고 했어요.”

“그 내용이 어젯밤에는 없었습니다.”

“어젯밤에는 확인되지 않았겠지요.”

유세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마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세요 유세프. 내가 저 설명을 믿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 말은 단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렇겠죠. 하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한 설명이 너무 빨리 생겼습니다.”

“그래요. 그건 저도 동의해요.”

카림은 탁자 끝에 서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지 않은 채 두 손으로 등받이를 붙들고 있었다. 숙소에서 출발한 뒤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형.”

유세프가 고개를 들었다.

“발표 취소해.”

“안 돼.”

대답은 짧았다. 카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 생각해봐. 어젯밤에 형 이름으로 누군가 전산 기록을 바꿨어.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오늘 아침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보고서까지 나왔고. 그런데 그대로 단상에 올라가겠다고?”

“그래서 올라가야 해.”

“무슨 논리야, 그게?”

“오늘 내가 빠지면 연구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가 돼.”

유세프는 탁자 위의 발표자료를 정리했다.

“이미 초록이 배포됐고 참석자들이 와 있어. 내가 발표를 취소하는 순간, 어젯밤 일은 단순한 개인적인 착오 또는 자료관리 문제로 정리될 거야. 그리고 나서는 내가 무슨 이유로 비공개 기록에 접근했는지 조사하겠지.”

“그게 목숨보다 중요해?”

유세프의 손이 멈췄다.

“무슨 말이야? 누가 날 죽인다고 했어?”

“그 말을 해야만 알아?”

“카림.”

“형이 어제부터 계속 말하지 않는 게 있잖아.”

카림은 탁자 위의 검은색 서류철을 가리켰다.

“형이 숨기고 있는 게 도대체 뭔데?”

유세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 수첩 때문이야?”

“그 얘기는 지금 하지 마.”

“또 그러네.”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니라고.”

“그럼 어디서 할 건데? 집에서는 어머니가 들을까 봐 안 되고, 박물관에서는 누가 듣는지 몰라서 안 되고, 전화로는 기록이 남아서 안 되고. 형이 말할 수 있는 곳이 세상에 있기는 해?”

유세프가 카림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침묵은 어제의 것보다 길었다. 살마가 발표자료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표지에는 영어로 발표 제목이 적혀 있었다.

검게 덮인 왕명과 근대 보존처리의 흔적 출처 재분류 유물군에 대한 예비 분석

“이거…원래 준비한 자료와 다르네요?”

살마가 말했다. 유세프는 시선을 그녀 쪽으로 옮겼다. 적막이 흐르자 도윤이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유세프…몇 장 삭제했나요?”

“일곱 장입니다.”

“분석결과를요?”

“일부만.”

도윤은 발표자료의 페이지를 넘겼다. 전날 밤 보았던 석재 파편의 가시광선 사진과 적외선 이미지, 검은 층의 단면, 셸락 계열 수지의 분석값이 순서대로 들어 있었다. 출토지 변경이 확인된 다른 유물 한 점도 비교표본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그 이후에는 연구의 한계와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이어졌다. 발표 자료만 따진다면 신중한 보존과학자의 예비보고였다. 유물 몇 점에서 고대의 훼손이 아닌 근대의 표면처리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 유물들의 출처기록에 공통적인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정도였다. 조직적인 출처 조작이나 의도적인 은폐라는 결론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윤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긴 뒤 물었다.

“음…세 번째 표본도 뺐습니까?”

유세프의 눈이 움직였다. 카림이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표본?”

살마가 도윤을 바라보았다. 도윤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질문이 너무 빨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날 밤 유세프가 화면을 전환하는 순간, 파일 목록 한편에 잠깐 나타났던 이름이었다.

‘SN–03’

정식 유물번호라기보다 연구용 시료번호처럼 보였다. 화면이 바뀌기 전에 지나쳤고, 유세프도 설명하지 않았다. 유세프가 발표자료를 도윤에게서 가져왔다.

“오늘은 두 점만 다룹니다.”

“세 번째 것도 검은 층이 있었습니까?”

“아직 발표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실물은 어디 있습니까?”

유세프는 서류철을 닫았다.

“그 질문에는 나중에 답하겠습니다.”

카림이 말했다.

“형, 이 얘기…나는 처음 듣는데.”

“그러니까 지금은 묻지 마.”

“왜 나한테까지 숨겨?”

“너라서 숨기는 게 아니야.”

“그 말을 믿으라고?”

“믿든지 말든지 그건 너의 자유야.”

유세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발표가 우선이야.”

회의실 문을 여는 순간, 복도에서 기다리던 행사 직원이 다가왔다. 발표자 사전점검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었다. 유세프는 자료가 든 가방을 들었고, 살마는 분석결과 원본이 담긴 서류함을 챙겼다. 카림은 형의 등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따라나섰다. 도윤은 탁자 위에 남은 전날 밤의 인쇄물을 접어 노트 사이에 끼웠다.

종이는 증거가 아니었다. 누가 언제 출력했는지, 화면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출력 이후 내용이 고쳐지지 않았는지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사라진 항목이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는 노트를 가방 깊숙이 넣었다. 전날 밤 유세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종이가 안전해서가 아니다. 적어도 보고 있는 동안 글자가 바뀌지는 않는다.

국제회의장은 박물관의 전시동과 연구동 사이에 놓여 있었다. 천장이 높은 원형 로비를 지나자 여러 언어로 적힌 행사 안내판과 참가자 명찰이 보였다. 전날의 조용한 보존연구동과 달리, 아침부터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정장을 입은 학자와 보존과학자, 박물관 관계자들이 작은 무리를 이루어 대화를 나누었고, 동시통역 수신기를 확인하는 직원들이 객석 사이를 돌아다녔다. 무대 뒤편의 대형 화면에는 세미나의 제목이 떠 있었다.

「이름, 기억, 출처 고대 유물의 훼손과 현대 기록의 재구성」

그 아래에는 마아트 재단의 흰 깃털 문양이 있었다. 카림이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 로고, 이제 보기만 해도 질리네.”

주원이 명찰을 목에 걸며 말했다.

“그냥 네가 어제부터 계속 쳐다봐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니…어디에나 붙어 있잖아.”

“돈을 많이 냈나 보지.”

“문제는 돈을 낸 사람이 어디까지 들어오느냐지.”

태겸의 말에 카림이 그를 보았다.

“어제 일 때문이야?”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단정할 이유도 없어.”

주원이 말했다.

“너답게 도움이 안 되는 말이네.”

“지금 도움이 되는 확신은 대부분 위험해.”

태겸은 객석 뒤쪽을 살폈다. 발표장 앞줄에는 기관별 좌석표가 놓여 있었다. 이집트 문화유산 관계자와 해외 박물관 대표, 후원재단 이사들이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반 연구자들은 그 뒤편에 앉았다. 유세프의 이름은 오전 두 번째 발표 순서에 올라 있었다.

첫 순서는 개회사와 기조연설이었다. 행사 책임자가 무대에 올라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마아트 유산재단 이사장을 소개했다. 레온 바이스는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올랐다. 도윤이 처음 받은 인상은 그가 예상보다 조용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화면과 홍보물에서 보았던 재단의 규모를 생각하면, 강한 몸짓과 확신에 찬 목소리를 가진 인물을 떠올리기 쉬웠다. 그러나 레온은 박수가 완전히 멎을 때까지 단상 한쪽에 서서 기다렸고, 마이크 앞에 선 뒤에도 곧바로 말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오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회색이 섞인 머리를 짧게 정리했고, 짙은 남색 정장에는 재단의 표식이나 눈에 띄는 장식이 없었다. 얇은 금속 테 안경 너머의 눈은 객석의 한 지점이 아니라 천천히 전체를 훑었다. 그는 먼저 아랍어로 짧게 인사했다. 이어 영어로 말을 이었다.

“통합기록 사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효율성부터 말합니다. 서로 다른 번호를 하나로 묶고, 흩어진 자료를 검색 가능하게 만들며, 연구자가 국경을 넘어 같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합니다.”

화면에 여러 박물관의 낡은 등록카드와 디지털 화면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러나 기록은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기록은 물건을 둘러싼 판단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남깁니다. 어떤 유물이 처음에는 출처 미상으로 분류되었다가 훗날 특정 발굴지와 연결되었다면, 우리는 최종 결론만큼이나 그 변화의 과정도 보존해야 합니다.”

도윤은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전날 밤 벌어진 일과 정반대에 있었다. 레온은 잠시 말을 멈춘 뒤 화면을 바꿨다. 오래된 장부의 가장자리에 여러 번 덧붙인 주석들이 보였다.

“정돈은 삭제와 달라야 합니다. 표준화는 이전의 혼란을 감추기 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래된 기록에는 오류가 있고, 때로는 편견과 폭력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록을 깨끗하게 보이도록 다듬는 순간, 우리는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가 존재했다는 역사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객석 곳곳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카림이 도윤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저 말 그대로만 하면 성인이지.”

도윤은 시선을 단상에서 떼지 않았다.

“좋은 말인 건 맞잖아.”

“문제는 좋은 말을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대개 돈도 제일 많다는 거야.”

주원이 낮게 말했다.

“그건 네 편견 아니냐?”

“경험이야.”

레온의 연설은 길지 않았다. 그는 마아트 재단이 출처기록의 원본과 수정이력을 함께 보존하겠다고 약속했고, 학술기관과 국가기관의 감시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화면에 흰 깃털과 통합기록 가동일이 나타났다.

‘10 DAYS’

“우리가 만드는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닙니다.”

레온이 말했다.

“서로 다른 기록들이 사라지지 않고 함께 검토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박수가 이어졌다. 유세프는 무대 뒤편 출입구에 서 있었다. 그 역시 레온의 연설을 듣고 있었지만 박수를 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적대적인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단상보다 객석 오른쪽 뒤편에 머물러 있었다. 도윤은 그 방향을 따라가 보았다.

통역부스 아래, 출입문 가까운 좌석에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짙은 회색 정장에 검은 넥타이를 맸고, 무릎 위에는 얇은 서류가방을 올려놓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다. 마흔 후반쯤으로 보였으며, 짧게 자른 갈색 머리와 마른 얼굴은 유럽 어느 연구기관의 행정책임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명찰은 뒤집혀 있었다. 흰색 뒷면만 보였다. 도윤이 다시 유세프를 바라보았을 때, 유세프는 이미 대기실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기조연설이 끝난 뒤 십오 분간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참석자들은 로비로 나가 커피를 마시거나 서로 명함을 교환했다. 도윤은 자료집을 챙기던 중 카림이 누군가에게 불리는 것을 보았다. 레온 바이스였다. 그는 가까이에서 보아도 과장된 친절을 보이지 않았다. 카림과 아랍어로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유세프의 상태를 물었다. 카림이 대답하자 레온은 대기실 쪽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전산 오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영어로 바뀐 대화가 도윤에게도 들렸다. 카림의 표정이 달라졌다.

“벌써 알고 있습니까?”

“기술팀이 오늘 새벽 보고했습니다. 이관시험 중 일부 유산필드가 예정보다 일찍 보관 처리되었다고요.”

“유세프의 계정이 다른 단말기에서 사용됐습니다.”

“그 부분도 조사 중입니다.”

레온은 변명부터 하지 않았다.

“인증체계의 문제라면 재단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원본 로그를 별도로 보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전산팀이 준 보고서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되어 있던데요.”

“기술적인 오류가 없다는 것과, 절차가 적절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카림은 곧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레온의 시선이 도윤 일행에게 옮겨왔다.

“서도윤 박사님이시군요.”

그는 도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논문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기억의 말살이 언제나 물리적인 파괴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유세프 박사의 발표와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겠지요.”

레온은 주원과 태겸에게도 차례로 인사했다. 주원이 쓴 신전 이전과 공간 복원의 논문, 태겸의 19세기 필사본 연구까지 알고 있었다. 재단 이사장이 모든 참석자의 논문을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 정리해준 내용을 외워와 형식적으로 나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논문의 제목보다 논점과 방법을 언급했다.

“어젯밤 일 때문에 발표를 미루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레온이 카림에게 물었다.

“안 미룬답니다.”

“유세프답군요.”

“저희 형을 잘 아십니까?”

“함께 일한 기간은 길지 않습니다만, 자신의 의심보다 자료를 더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는 것은 압니다.”

레온의 목소리에는 유세프를 달래거나 치켜세우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리곤 하지요.”

카림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레온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저는 단지 연구자로서의 위험을 말한 겁니다. 검증되지 않은 결론을 너무 일찍 공개하면 연구 자체가 공격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 순간 발표장 안에서 다음 순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레온은 도윤 일행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발표가 끝난 뒤 다시 뵙겠습니다.”

그가 돌아서자 카림이 낮게 말했다.

“저 사람은 늘 저렇게 말해?”

“처음 봤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도윤이 대답했다.

“말 하나는 흠잡을 데가 없군.”

태겸이 말했다. 주원은 레온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객석으로 들어갔다.

“어쩌면…그게 제일 흠일 수도 있지.”

발표장 조명이 어두워졌다. 유세프가 단상에 오르자 객석의 대화가 잦아들었다. 그는 연단 위에 준비해둔 원고를 펼쳤지만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무대 뒤편 화면에는 검게 덮인 카르투슈의 확대사진이 떠 있었다. 흰색과 황갈색의 석회암 표면 한가운데, 검은 타원이 놓여 있었다. 유세프는 객석을 한 번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빈 카르투슈는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가시광선 사진 옆에 적외선 촬영결과가 나타났다. 검은 층 아래에 감춰진 왕명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우리가 오랫동안 왕명 말살의 사례로 분류해온 유물 가운데 일부는, 이름이 물리적으로 제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자의 홈은 거의 온전했고, 고대의 안료도 일부 남아 있었습니다. 그 위에 후대의 검은 층이 덧씌워져 있었습니다.”

유세프의 목소리는 아침 회의실에서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전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발표를 시작한 뒤에는 손도 목소리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시료를 채취한 위치와 분석방법을 설명했다. 탄소계 안료와 셸락 계열 수지, 미량의 침엽수성 수지가 검출되었으며, 검은 층 아래에 고대의 청색 안료와 근대 보강제가 차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두 번째 유물이 화면에 나타났다. 시대와 공식 출토지가 다른 석판이었다. 그것에도 같은 방식으로 검은 층이 덧입혀져 있었다.

“현재 단계에서 두 유물이 동일한 사람이나 같은 작업장에서 처리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재료의 구성과 도포방식에 유의미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음 화면에는 두 유물의 출처기록이 날짜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 출처 미상.

– 상이집트 추정.

– 아비도스.

– 덴데라.

불확실한 기록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적인 장소를 얻었다. 그러나 그 변경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발굴보고서나 현장사진은 발견되지 않았다. 유세프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췄다.

“물론 이 두 가지 사실을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근대의 표면처리가 출처기록 변경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입증할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다만 왕명과 출토지 사이에 모순이 있었고, 그 왕명을 가리는 처리가 이루어진 뒤 새로운 출처가 부여되었다는 시간적 순서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윤은 객석을 둘러보았다. 앞줄의 보존과학자 몇 명은 화면의 성분표를 촬영했고, 박물관 관계자들은 등록번호가 가려진 자료를 유심히 보았다. 뒤쪽에서는 누군가 노트북 자판을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회색 정장의 남자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명찰은 여전히 뒤집혀 있었다. 그는 메모하지 않았다. 노트북도 없었다. 등받이에 기대 앉아 유세프만 바라보고 있었다.

발표는 25분 동안 이어졌다. 유세프는 검은 층을 제거하지 않은 이유와 비파괴 촬영의 한계, 시료의 오염 가능성을 설명했다. 하산의 기록이나 전날 밤 데이터베이스에서 벌어진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세탁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았다. 결론은 조심스러웠다. 검은 층은 고대의 왕명 말살 흔적이 아니다. 적어도 일부 유물에서는 근대의 의도적인 표면처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 유물들의 출처기록에는 공통적인 변경양상이 있다. 두 현상의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유물군과 원본 등록자료의 대조가 필요하다.

마지막 화면이 나타났다. 검은 카르투슈 아래에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무엇이 지워졌는가보다, 무엇을 믿게 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유세프가 발표를 마쳤다. 박수는 크지 않았지만 길었다. 단상 옆의 좌장이 마이크를 켰다.

“질문을 받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는 프랑스의 보존과학자였다. 그는 셸락 계열 수지의 연대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며, 19세기 후반의 처리와 20세기 중반의 복원을 성분만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물었다. 유세프는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 답했다.

“성분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층위와 도포방식, 최초 촬영사진 및 복원기록을 함께 검토하고 있습니다. 오늘 발표한 것은 절대연대의 확정이 아니라 고대 처리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질문자는 이집트의 박물관 등록담당자였다.

“출처기록의 변경은 초기 전산화 과정에서 흔히 발생했습니다. 임시번호를 정식번호로 전환하면서 당시 알려진 발굴정보를 소급 입력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것을 조작 가능성과 연결하면 과도한 해석이 되지 않습니까?”

“그 가능성에 동의합니다.”

유세프는 반박부터 하지 않았다.

“다만 소급 입력의 근거가 된 문서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현재까지는 두 유물 모두 변경된 출처를 뒷받침하는 현장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조작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정상적인 정리과정이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이릅니다.”

세 번째 질문은 검은 층 제거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유세프는 연구윤리와 유물의 안정성을 이유로 현재는 제거를 계획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좌장이 다음 질문자를 찾았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손을 들었다. 행사 직원이 통로를 따라 무선마이크를 전달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마이크를 받아 입 가까이 가져갔다.

“흥미로운 발표였습니다.”

목소리에는 뚜렷한 억양이 없었다. 영국식에 가까웠지만, 모국어를 숨기도록 오래 훈련된 사람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 표본에서는 검은 층 아래에 청색 안료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도 동일한 처리군으로 분류하신 근거가 무엇입니까?”

발표장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유세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발표용 리모컨이 움직임을 멈췄다. 좌장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자료집을 내려다보았다.

“어…죄송합니다…질문자님께서는 혹시 두 번째 표본 말씀하신 걸까요?”

남자는 좌장이 아니라 유세프를 보고 있었다.

“SN–03입니다.”

카림이 도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겸도 움직이지 않은 채 단상을 바라보았다. 유세프는 마이크를 조금 가까이 당겼다.

“오늘 발표한 표본은 두 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세 번째 표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남자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발표에서 제외하신 표본 말입니다.”

객석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좌장이 끼어들었다.

“질문자의 성명과 소속을 먼저 밝혀주시겠습니까?”

남자는 자신의 명찰을 내려다보았다. 뒤집힌 카드의 끈을 손끝으로 만졌지만 앞면으로 돌리지는 않았다.

“배포된 연구자료에서 보았습니다.”

“어떤 연구자료입니까?”

유세프가 물었다.

“SN–03의 표면분석 요약본입니다.”

“그런 자료는 배포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잘못 보았나 보군요.”

남자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번호까지 잘못 기억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유세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좌장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성명과 소속을 밝혀주십시오.”

남자는 그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컸다.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마른 체격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통로에 서 있던 직원에게 돌려준 뒤 재킷 단추를 잠갔다.

“질문은 철회하겠습니다.”

“잠깐만요.”

유세프가 말했다. 남자는 단상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당황이나 후회가 없었다. 답을 듣지 못해 실망한 사람의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필요한 것을 확인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옆 사람의 무릎을 피해 통로로 나온 뒤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주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윤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

“나가잖아.”

“행사 직원이 확인할 거야.”

“저 사람이 그걸 기다릴 것 같아?”

주원은 도윤의 손을 떼어낸 뒤 통로로 나갔다. 단상에서는 좌장이 질문을 정리하려 했다.

“발표자가 공개하지 않은 자료에 관한 질문은 확인이 어렵습니다. 다른 질문을 받겠습니다.”

그러나 객석의 관심은 이미 발표에서 벗어나 있었다. 유세프는 출입문이 닫힌 곳을 바라보았다. 마이크를 쥔 손등의 힘줄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객석을 향했다.

“오늘 발표한 연구는 검증이 완료된 두 표본에 한정합니다.”

목소리는 안정되어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랐다.

“공개하지 않은 자료의 존재 여부와 그 내용에 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질문자가 어떤 경로로 어떤 정보를 보았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줄의 한 연구자가 손을 들었다. 유세프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질문을 마치겠습니다.”

좌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발표 종료를 선언했다. 박수가 나왔지만 이번에는 짧고 흩어져 있었다.

유세프는 자료를 챙기지 않은 채 무대 뒤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원은 복도 끝에서 회색 정장의 남자를 놓쳤다. 발표장 출입문을 나왔을 때 남자는 중앙로비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주원은 몇 사람 사이를 헤치며 뒤따랐다. 남자는 뛰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계단 아래에는 다른 행사의 참석자들이 몰려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자들과 단체 관람을 온 학생들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주원은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회색 어깨를 좇았다. 남자는 오른쪽으로 꺾어 직원 전용 통로 쪽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주원이 그를 불렀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잠깐 이야기하시죠.”

통로 끝의 유리문이 열렸다. 직원 하나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가 문을 닫기 전에 몸을 밀어 넣었다. 주원이 달려갔다. 그러나 몇 걸음 늦었다. 유리문이 닫히며 잠금장치가 작동했다. 카드단말기 위의 붉은 불이 들어왔다. 문 너머의 복도는 두 방향으로 갈라져 있었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주원이 손잡이를 당겼지만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쪽에서 방금 나온 직원이 돌아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 저 안으로 들어간 남자, 어느 부서 사람입니까?”

직원은 유리문 너머를 돌아보았다.

“누구요?”

“회색 정장. 방금 당신이 나올 때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안 들어갔습니다.”

“내가 봤습니다.”

직원은 카드단말기를 가리켰다.

“이 문은 출입증 없이는 열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열고 나왔잖아요.”

“저와 같이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들어간 사람입니다.”

직원은 한동안 주원을 바라보았다. 주원이 영어를 잘못 알아들은 사람인지 판단하는 듯했다.

“보안요원을 부를까요?”

주원은 유리문 안쪽을 다시 살폈다. 왼쪽 복도 끝에 방화문 하나가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누가 지나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예. 부르십시오.”

직원은 벽의 내선전화로 보안실에 연락했다. 주원은 출입문 옆에 붙은 안내판을 보았다. 이 통로는 연구동과 행정동을 연결하고 있었다. 행정동 동쪽 4층. 전날 밤 유세프의 계정이 접속한 것으로 표시된 단말기도 그곳에 있었다.

발표장 뒤편의 대기실에서 유세프는 넥타이를 풀어 의자 위에 던졌다. 살마가 문을 닫자 카림이 곧장 물었다.

“형, SN–03이 뭐야?”

“여기서는 말하지 마.”

“방금 수백 명 앞에서 누가 번호까지 말했어.”

“그러니까 더 말하면 안 돼.”

“나도 모르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알아?”

유세프는 가방을 열어 노트북을 꺼냈다.

“몰라. 나도 그걸 확인하려는 거야.”

“형.”

카림이 노트북 화면을 손으로 막았다.

“질문에 답해.”

유세프가 동생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비켜.”

“싫어.”

“카림.”

“어젯밤부터 형이 하는 말은 전부 똑같아. 나중에 말한다, 여기서는 안 된다, 아직 확인할 수 없다.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도 나중이라고 할 거야?”

유세프가 노트북을 내려놓았다.

“나도 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

“그건 물어보지 않았어.”

“SN–03에 관해서 지금 말할 수 있는 것도 없어.”

“표본이 실제로 있기는 해?”

유세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카림을 더 격하게 만들었다.

“형이 만든 번호야?”

“카림.”

“아버지 기록에서 나온 거야?”

“그 얘기와는 지금 이건 상관없어.”

“그럼 뭔데?”

살마가 두 사람 사이로 한 걸음 들어왔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닙니다.”

카림이 그녀를 보았다.

“당신은 알고 있어요?”

살마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SN–03이 뭔지 알고 있습니까?”

“유세프가 작업 중인 연구자료에 그 번호가 있다는 건 압니다.”

“실물을 봤어요?”

살마의 시선이 유세프에게 향했다. 유세프가 짧게 말했다.

“살마.”

그 한마디로 대답을 막았다. 카림은 헛웃음을 흘렸다.

“둘이 똑같군.”

“카림, 지금 밖에 누가 있는지 몰라.”

유세프가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말을 하든 여기서 나가는 순간 우리가 아니라 상대가 먼저 알 수 있어.”

“그 상대가 누군데?”

“모르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형은 왜 자꾸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

유세프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뭘 했는데?”

“발표를 강행했어. 자료가 지워졌는데도 계속 접근했고, 누가 따라붙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까지 끌어들였어. 형은 항상 자기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어디까지 위험해지는지는 나중에 생각하잖아.”

유세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카림을 밀어내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맞아.”

뜻밖의 대답에 카림이 입을 다물었다.

“그랬지.”

유세프는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을지 몰라.”

“형.”

“하지만 오늘 저 사람이 그 번호를 말한 순간부터, 이건 내 연구만의 문제가 아니야.”

그가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적어도 누가 내 파일에 들어왔는지는 확인해야 해.”

살마가 문 옆의 유선단말기를 살폈다.

“행사망에는 연결하지 마세요.”

“안 합니다.”

유세프는 가방 안쪽에서 작은 저장장치를 꺼냈다. 노트북의 무선연결을 모두 끈 뒤 저장장치를 꽂았다. 화면에 암호입력창이 나타났다. 그가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폴더 몇 개가 열렸다. 도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면을 지켜보았다.

유세프가 찾는 것은 분석자료 자체가 아니었다. 파일 접근기록이었다. 날짜와 시각, 사용된 장치, 열람과 복사 여부가 목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유세프는 화면을 빠르게 내리다가 한 지점에서 멈췄다.

SN–03

마지막으로 열린 시각은 그날 오전 7시 12분이었다. 발표 시작 두 시간 전. 접근장치는 표시되지 않았다. 사용자명도 비어 있었다. 다만 하나의 작업만 남아 있었다.

EXPORT COMPLETED

살마가 화면 가까이 다가왔다.

“내보내기가 됐어요?”

“보시는 대로…그렇게 되어 있군요.”

“어디로요?”

유세프가 세부기록을 열었다. 전송 대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파일이 외부로 복사되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살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저장장치에 있던 원본은 외부에서 접근할 수 없어요.”

“분석용 사본은 연구 서버에 있었습니다.”

“그건 격리 폴더였잖아요.”

“어젯밤 전까지는 그렇죠.”

카림이 물었다.

“그 번호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야?”

유세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와 살마.”

“둘뿐이야?”

유세프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시스템.”

카림의 입가가 비틀렸다.

“시스템은 사람이 아니야.”

유세프가 동생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는 내 이름을 썼어.”

대기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살마가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유세프는 저장장치를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문이 다시 두 번 울렸다.

“누구십니까?”

살마가 물었다. 밖에서 레온 바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온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살마는 유세프의 눈치를 살폈다. 유세프가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이자 살마는 문을 열었다. 레온은 혼자가 아니었다. 행사 보안책임자와 등록담당 직원이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방 안의 긴장된 얼굴들을 확인했지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질문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레온이 말했다. 카림이 앞으로 나섰다.

“등록명단에는 있습니까?”

등록담당 직원이 태블릿을 확인했다.

“그 좌석 구역의 참석자들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명찰을 하고 있었어요.”

도윤이 말했다.

“뒤집혀 있었습니다.”

“현장등록 명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면 설마 현장등록 기록도 없다는 뜻입니까?”

직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레온이 말했다.

“주원 박사님이 직원통로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출입기록은요?”

살마가 물었다. 보안책임자가 답했다.

“해당 시각에 등록된 출입은 없습니다.”

주원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숨이 조금 가빠져 있었다.

“누군가 지나갔습니다. 안쪽 방화문이 닫히는 것도 봤어요.”

“확인 중입니다.”

보안책임자의 말투는 예의 바르지만 단단했다.

“그 시간에는 직원 한 명이 밖으로 나왔을 뿐입니다.”

“그 직원이 문을 열었고, 남자가 그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직원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진술했습니다.”

“내가 잘못 봤다는 겁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늘 그렇게 말하죠.”

주원이 한 걸음 다가갔다.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확인된 문제도 없다는 식으로.”

레온이 보안책임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입기록뿐 아니라 내부 영상을 확인해주십시오. 해당 통로와 연결된 모든 출구도요.”

“이미 지시했습니다.”

“원본을 보존하십시오. 자동 덮어쓰기가 되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레온은 두 직원을 먼저 내보냈다. 문이 닫힌 뒤, 그는 유세프를 바라보았다.

“질문자가 언급한 표본은 실제 연구자료입니까?”

유세프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비공개 자료입니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짐작합니까?”

“아니요.”

“어젯밤 전산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까?”

“그것도 모릅니다.”

레온은 더 캐묻지 않았다.

“재단 보안팀이 연구서버의 원본 로그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유세프 박사가 원한다면 외부 디지털 포렌식 기관에도 맡기겠습니다.”

“서버에 더는 접근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즉시 제한하겠습니다.”

“복사본을 만들지 말고요.”

레온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

“조사에는 복사본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조사하지 않겠습니다.”

살마가 유세프를 바라보았다. 레온은 화를 내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 결정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지금보다 위험하지는 않겠지요.”

“이미 누군가 자료를 가지고 있다면, 서버를 닫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레온은 유세프의 얼굴을 한동안 살폈다.

“오늘 남은 일정은 취소하십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유세프 박사님. 발표는 끝났습니다.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는 제가 정합니다.”

카림이 끼어들었다.

“형, 오늘은 그만 가.”

유세프는 동생을 보지 않았다. 레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세프 박사님.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 공개되지 않은 표본번호를 알고 있었고, 그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수백 명이 있는 발표장에 직접 들어왔습니다.”

그는 말끝을 조금 늦췄다.

“그 사람이 두려움을 주려 했다면 이미 성공했습니다. 반대로 당신의 반응을 확인하려 했다면, 그것도 성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세프의 눈빛이 달라졌다. 도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색 정장의 남자는 답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유세프가 세 번째 표본을 알고 있는지. 발표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했는지. 그 번호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되었다.

“경호를 붙이겠습니다.”

레온이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제안이라기보다 주최기관의 책임입니다.”

“그럼 행사장 안에서만 책임지십시오.”

“밖에서는요?”

“제 일입니다.”

“이제는 당신 혼자만의 일이 아닌 듯합니다.”

유세프는 레온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레온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그는 문을 열기 전 도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서 박사님.”

“네.”

“오늘 유세프 박사와 함께 있어주시겠습니까?”

유세프가 곧바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레온은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도윤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혼자 있게 두지는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온은 짧게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카림이 유세프를 향해 말했다.

“저 말은 맞아.”

“뭐가?”

“오늘 혼자 다니지 마.”

“나한테 붙어 있는 편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그건 형이 정할 일이 아니야.”

유세프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네 말 안 들었던 건 알지?”

“그래서 아버지랑 똑같다는 거야.”

웃음이 사라졌다. 카림도 자신이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을 거두지는 않았다. 유세프는 한동안 동생을 바라보았다.

“저녁에는 집에 갈게.”

“진짜로?”

“어머니에게도 연락하고.”

“나랑 같이 가.”

“안 돼.”

“왜?”

“먼저 확인할 게 있어.”

카림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젖혔다.

“또?”

“한 시간만.”

“형이 말하는 한 시간은 늘 아침이 되더라.”

“이번에는 다를 거야.”

유세프는 가방을 들었다. 도윤이 물었다.

“세 번째 표본을 확인하려는 겁니까?”

유세프가 그를 보았다.

“네.”

“실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일 아침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안 됩니까?”

“오늘은 누가 봤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요?”

유세프의 손이 가방 손잡이 위에서 멈췄다.

“가지고 있는 것과 봤다고 믿는 것은 다릅니다.”

도윤은 그 말의 의미를 물으려 했지만 유세프가 먼저 돌아섰다.

“내일 오전 8시에 봅시다.”

“어디에서요?”

“박물관 동쪽 행정동 로비에서 만나죠. 그때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카림이 말했다.

“형, 나도 간다.”

“그래.”

유세프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살마에게 저장장치를 하나 건넸다.

“이건 당신이 보관해요.”

“무엇이 들었습니까?”

“오늘 발표한 두 표본의 원본자료입니다.”

“세 번째 것은요?”

유세프는 가방을 어깨에 멨다.

“다른 곳에 있습니다.”

살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에요?”

“아직은 말할 수 없습니다.”

“나까지 의심하는 겁니까?”

유세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긍정보다 더 나빴다. 살마가 저장장치를 움켜쥐었다.

“그럼 적어도 혼자 가지는 마세요.”

“혼자 안 갑니다.”

“누구와 가는데요?”

유세프는 문을 열었다.

“내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잖아요.”

카림이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유세프는 이미 복도로 나간 뒤였다.

행사 등록담당 직원은 질문자의 신원을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주원은 발표가 끝난 지 한 시간이 지난 뒤 등록데스크에서 회색 정장의 남자가 앉았던 좌석표를 확인했다. 좌석은 특정 인물에게 배정된 자리가 아니었다. 해외 기관의 현장등록 참석자를 위해 비워둔 구역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새로 발급된 명찰은 없었다. 무선마이크를 전달한 직원은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분명히 마이크를 건넸잖습니까?”

주원이 묻자 젊은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질문자가 여러 명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질문 하나만 했어요.”

“죄송합니다. 발표내용을 확인하느라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명찰은?”

“뒤집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왜 신원 확인을 안 했죠?”

“행사장에 들어왔으니 등록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원은 더 따지지 않았다. 도윤은 등록데스크 맞은편에 설치된 행사 사진 화면을 보고 있었다. 공식 사진사가 촬영한 사진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레온의 기조연설. 객석 전경. 유세프가 적외선 분석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도윤은 객석이 넓게 나온 사진을 찾아 화면을 넘겼다. 세 번째 사진에서 회색 정장의 남자가 보였다. 오른쪽 뒤편 좌석. 그는 다른 참석자들과 달리 화면을 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윤이 사진을 확대했다. 명찰은 뒤집혀 있었지만 끈의 색이 다른 참석자들과 달랐다. 일반 연구자는 파란색, 기관 관계자는 흰색, 언론과 행사직원은 회색 끈을 사용했다. 남자의 명찰 끈은 검은색이었다. 도윤이 등록담당 직원에게 물었다.

“검은색 끈은 어떤 참석자에게 줍니까?”

직원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저희 행사 명찰에는 검은 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건 뭡니까?”

직원이 사진을 확대했다.

“모르겠습니다.”

주원이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재단 쪽은?”

“재단도 흰색입니다.”

“박물관 직원은요?”

“출입증 형태가 다릅니다.”

도윤은 남자의 얼굴을 더 확대했다. 화질이 흐려졌지만 윤곽은 알아볼 수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정돈된 머리, 가느다란 코, 카메라 쪽이 아니라 무대 위 유세프에게 고정된 눈. 도윤은 사진을 자신의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진 제공은 행사 종료 후 가능합니다.”

“화면으로라도 촬영하겠습니다.”

그가 휴대전화를 꺼내려는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자동 슬라이드가 다음 사진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도윤은 이전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사진이 나타나지 않았다. 목록에서도 사라져 있었다.

“방금 있던 사진 어디 갔습니까?”

직원이 관리화면을 열었다.

“아마 사진사가 삭제한 것 같습니다.”

“왜요?”

“초점이 맞지 않았거나 중복사진일 수 있습니다.”

주원이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또 없어졌군.”

직원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윤은 빈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유물의 최초 출처가 사라졌다. 오늘은 질문자의 얼굴이 사라졌다. 두 경우 모두 설명은 있었다. 자료 이관. 중복사진 정리. 기술적으로는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후 일정이 시작될 무렵, 유세프는 행사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카림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도 읽지 않았다. 살마는 보존연구동에 돌아가 보았지만 유세프의 연구실은 비어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도윤 일행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박물관 로비에서 기다렸다.

해가 지며 피라미드의 윤곽이 유리벽 너머로 어두워졌다. 관람객들은 빠져나갔고, 청소 직원들이 전시구역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오후 6시가 조금 지나 유세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카림의 휴대전화였다.

내일 아침 여덟 시. 약속대로 가겠습니다. 오늘은 찾지 마십시오.

카림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만 나왔다.

“나보고 이걸 믿으라는 건가?”

그가 말했다. 도윤은 메시지의 문장을 다시 읽었다. 유세프는 평소 카림에게 공손하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시지는 매우 공손한 말투로 작성되어 있었다. 도윤이 물었다.

“유세프가 너한테 이렇게 말해?”

카림도 이미 같은 점을 알아차린 듯했다.

“아니.”

“자동번역을 쓴 건?”

“형은 나한테 아랍어로 보내.”

화면에 표시된 문장은 영어였다. 카림은 메시지의 원문을 다시 확인했다.

I will be there at eight tomorrow morning, as promised.

Do not look for me tonight.

유세프가 카림과 영어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이유는 없었다. 태겸이 물었다.

“발신번호는 맞아?”

“맞아.”

“그렇다면…어쩌면 누가 전화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네.”

카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도윤은 메시지가 도착한 시각을 보았다.

오후 6시 12분.

그 시각, 유세프의 비공개 연구폴더에서는 SN–03 파일이 다시 한 번 열리고 있었다. 박물관 반대편 행정동에서였다.

Leave a Reply

Discover more from 은호의 서재

Subscribe now to keep reading and get access to the full archive.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