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2025년 11월 10일, 기자

박물관은 문을 닫은 뒤에야 본래의 크기를 드러냈다. 낮에는 관람객들의 목소리와 발걸음, 안내방송과 셔터 소리가 넓은 공간을 잘게 나누어놓았다. 그러나 마지막 관람객이 퇴장하고 출입구가 하나씩 닫히자, 천장은 이전보다 높아지고 복도는 끝없이 길어졌다. 낮 동안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던 석상과 석관들은 다시 인간의 시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서도윤은 서쪽 직원 출입구 맞은편에서 시계를 확인했다. 19시 23분이었다. 유세프가 말한 시간보다 칠 분 일렀다.

입구 앞에는 퇴근하는 직원들이 짧은 줄을 이루고 있었다. 흰 가운을 접어 팔에 걸친 사람, 투명한 보관함을 들고 나오는 사람, 출입증을 목에서 풀어 가방에 넣는 사람. 누구도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건물 안에 더 오래 남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한주원은 박물관 외벽을 올려다보았다.

저녁빛은 이미 사라졌지만 거대한 석재 외벽에는 낮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유리와 돌이 만나는 경계 위로 실내 조명이 희미하게 비쳤다. 멀리 어둠 속에 놓인 피라미드의 윤곽은 박물관 건물보다 오히려 작게 보였다.

“유세프에게 연락은 왔어?”

주원이 물었다. 카림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네 시에 한 번.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했어.”

“어디로?”

“안으로.”

“그건 장소가 아니잖아.”

카림은 대꾸하지 않았다.

윤태겸은 출입구 옆 벽에 붙은 안내문을 읽고 있었다. 아랍어와 영어로 보안 절차가 적혀 있었다. 외부 연구자는 사전 등록된 장비 외의 촬영기기를 반입할 수 없고, 보존연구동에서는 개인 휴대전화와 무선통신기기를 지정 보관함에 넣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휴대전화도 두고 들어가야겠네.”

태겸이 말했다.

“유세프가 그래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건가?”

도윤이 묻자 카림이 고개를 저었다.

“이 구역은 원래 그래.”

“그러면 안에서 연락할 방법은?”

“내선전화가 있어.”

주원이 웃음기 없이 말했다.

“요즘 세상에 휴대전화가 안 되는 곳만 골라 들어가는 기분이군.”

19시 27분, 직원 출입구 안쪽에서 한 여성이 나왔다. 마흔 전후로 보였다. 검은 머리를 뒤로 단단히 묶었고, 흰색 실험복 위에 회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가슴에 달린 출입증에는 아랍어 이름 아래 영어가 함께 적혀 있었다.

SALMA NAGUIB

Conservation Science Division

그녀는 카림과 짧게 인사를 나눈 뒤 도윤 일행을 차례로 확인했다. 반갑다거나 호기심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정해진 명단의 사람과 실제 얼굴이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눈이었다.

“유세프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화는 영어로 이어졌다. 살마는 작은 서류판을 내밀었다. 방문 목적과 반입 장비를 적는 양식이었다.

“휴대전화, 스마트워치, 무선통신이 가능한 기기는 모두 보관함에 넣어주십시오. 노트북은 등록된 두 대만 반입할 수 있습니다.”

주원이 물었다.

“카메라는 안 됩니까?”

“안 됩니다.”

“개인 기록용으로도요?”

“오늘은 안 됩니다.”

‘오늘은’이라는 말에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살마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보안검색대를 통과한 뒤 휴대전화와 시계를 금속 보관함에 넣었다. 직원이 보관함 문을 닫고 봉인 스티커를 붙였다. 열쇠는 주지 않았다. 출입할 때 다시 신원을 확인하고 직원이 직접 열어주는 방식이었다. 도윤이 서류판을 돌려주자, 보안요원이 화면을 바라보다가 살마를 불렀다.

“문제가 있습니까?”

카림이 물었다. 살마는 모니터에 표시된 내용을 확인했다.

“방문승인이 늦게 입력됐습니다.”

“승인이 안 된 겁니까?”

“아닙니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보안요원에게 아랍어로 몇 마디를 건넸다. 화면에 붉게 표시되어 있던 항목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도윤은 모니터 한편에 찍힌 시간을 보았다.

‘19:26’

그들이 입구 앞에 도착한 뒤였다. 승인자는 유세프 라티프로 되어 있었다.

“유세프는 안에 있습니까?”

도윤이 물었다. 살마는 출입문에 카드를 대며 대답했다.

“오늘 아침부터요.”

두꺼운 방화문이 짧은 기계음을 내며 열렸다.

“나간 적은 없습니까?”

“제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그들은 방문객 구역과 반대 방향으로 이어진 좁은 복도에 들어섰다. 외부에서 보았던 박물관의 규모와 화려함은 이곳에 없었다. 회색 바닥과 흰 벽,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방화문과 장비실이 전부였다. 천장 안쪽에서는 환기장치가 낮게 울렸고, 복도 끝의 비상등만 희미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커다란 석상 조각이 보였다. 얼굴과 몸통이 분리된 채 각각 받침대에 놓여 있었고, 검은 고정대가 목과 어깨의 파손면을 받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사람의 팔보다 긴 붓과 흡입기, 이동식 현미경이 정렬되어 있었다. 주원이 걸음을 늦췄다.

“저건 전시 전에 복원하는 겁니까?”

살마가 유리창 너머를 보았다.

“전시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요?”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겁니다. 복원과 전시는 같은 일이 아닙니다.”

주원은 더 묻지 않았다. 복도는 두 번 꺾인 뒤 더 좁아졌다. 두꺼운 유리문 앞에 붉은 경고등이 켜져 있었다. 문 옆의 패널에는 산소농도와 내부 압력이 숫자로 표시되었다.

‘O₂ 2.1%’

태겸이 걸음을 멈췄다.

“저 안은 뭡니까?”

“무산소 처리실입니다.”

살마가 말했다.

“목재나 직물 유물에 남은 해충을 제거할 때 사용합니다. 내부 공기를 질소로 치환합니다.”

유리 너머로는 은빛 밀폐막에 싸인 나무상자 몇 개가 보였다. 바닥과 벽면은 지나치게 깨끗했고, 방 한가운데 설치된 배관만이 일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카림이 패널을 보며 물었다.

“사람이 안에 들어갈 일도 있습니까?”

“가동 중에는 절대 없습니다.”

살마는 경고등 아래의 두 장치를 차례로 가리켰다.

“산소농도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안쪽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경보장치와 문 잠금장치는 서로 분리되어 있어서 하나가 고장 나도 다른 쪽은 작동합니다. 수동해제는 보안책임자와 보존과학 책임자의 승인이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살마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도윤은 몇 걸음 뒤따르다가 붉은 경고등을 돌아보았다. 패널의 산소농도는 2.1에서 2.0으로 내려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유리문 뒤의 공기만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상태로 조용히 바뀌고 있었다.

보존연구동의 가장 안쪽에 이르자 살마가 다시 카드를 꺼냈다. 이번 문에는 카드단말기뿐 아니라 숫자판과 지문인식기가 함께 달려 있었다. 그녀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손가락을 대자 문이 열렸다.

안쪽은 영상분석실이었다. 천장 조명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벽을 따라 놓인 모니터와 분석장비에서만 희미한 빛이 나왔다. 방 한가운데에는 검은 천으로 덮인 촬영대가 있었고, 그 위로 여러 파장의 조명을 비추는 장치가 매달려 있었다. 유세프는 가장 안쪽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어제 입었던 회색 정장은 아니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그 위에 흰 가운을 걸쳤다. 머리카락은 손으로 몇 번 쓸어 넘긴 듯 흐트러져 있었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는 검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일행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도 곧바로 돌아보지 않았다. 모니터에는 석재 파편의 확대사진이 떠 있었다. 검게 메워진 카르투슈의 한 부분이었다. 화면 오른쪽에는 붉고 푸른 선이 겹친 그래프가 여러 개 늘어서 있었다. 살마가 문을 닫았다.

“약속한 사람들이 왔습니다.”

유세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고맙습니다.”

그는 일행을 바라보다가 카림에게 시선을 멈췄다.

“어머니에게 연락했어?”

“내가 왜 해야 해?”

“오늘 저녁에 전화하겠다고 했잖아. 그건 형이 한 약속이야.”

유세프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끝나고 할게.”

카림은 아무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살마는 출입문 옆의 작은 패널을 조작했다. 문 위의 흰 등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외부 출입을 막았습니다.”

태겸이 물었다.

“안에서도 열 수 있습니까?”

“비상시에는 가능합니다.”

살마는 가운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유세프에게 건넸다.

“한 시간입니다.”

“두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시간 뒤에 야간 보안점검이 시작됩니다. 누군가 이 방에 있는 걸 발견하면 설명해야 합니다.”

“승인된 방문자들입니다.”

“단 7분 전에 승인된 방문자들이지요.”

유세프는 카드를 받아 책상 위에 놓았다. 살마가 도윤 일행을 바라보았다.

“여러분, 저는 유세프의 결론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유세프가 말했다.

“지금 그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필요합니다.”

살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보실 분석결과는 실제 자료입니다. 시료도, 촬영도, 성분분석도 조작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자료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유세프는 결론에 빨리 도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카림이 웃으며 낮게 말했다.

“그건 동의합니다.”

유세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보시죠.”

그가 촬영대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천을 걷어내자 낮은 받침대 위에 석재 파편 하나가 나타났다. 어젯밤 사진에서 본 것과 같은 물건이었다. 사진으로 볼 때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가로가 삼십 센티미터 가까이 되었다. 옅은 황갈색 석회암 표면에 사람의 어깨와 왕관 일부가 남아 있었고, 오른쪽에는 세로로 긴 카르투슈가 새겨져 있었다. 타원 안쪽은 검게 채워져 있었다. 검은 물질은 돌 표면 전체에 묻은 것이 아니었다. 상형문자가 새겨진 홈과 그 둘레만을 따라 정교하게 발라져 있었다. 가장자리에서는 얇게 갈라진 층이 비늘처럼 일어나 있었고, 그 아래로 푸른 안료가 가느다랗게 드러났다. 주원이 몸을 숙였다.

“돌 뒤쪽을 볼 수 있습니까?”

유세프가 장갑을 건넸다. 주원은 장갑을 낀 뒤 파편을 받침대째 조금 돌렸다. 뒷면에는 오래된 회반죽과 금속 고정구가 떨어져 나간 자국이 있었다. 한쪽 모서리에는 번호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절반 이상 갈려 있었다.

“벽에서 떼어낸 뒤 한 번 더 장착했군요.”

주원이 말했다.

“어디에?”

카림이 물었다.

“그건 모르지. 다만 뒷면에 서로 다른 모르타르가 두 층 있어. 처음 있던 벽에서 분리한 뒤 다른 곳에 붙였고, 거기서 다시 떼었다는 뜻이야.”

유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기록에는 발굴 직후 수장고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록이 틀렸거나, 이게 다른 물건이거나.”

“등록사진의 파손면과 일치합니다. 같은 물건입니다.”

태겸은 카르투슈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검은 층 아래 글자는 읽었습니까?”

유세프가 촬영대 위 조명을 껐다. 방이 어두워졌다. 그는 천장에 매달린 장비를 움직여 석재 위에 맞춘 뒤 컴퓨터를 조작했다. 처음에는 보라색에 가까운 빛이 파편 표면을 훑었다. 검은 층의 일부가 화면에서 창백하게 빛났고, 주변 안료는 서로 다른 농도로 드러났다. 이어 가시광선 사진과 적외선 촬영사진이 나란히 모니터에 나타났다. 왼쪽 사진에서는 카르투슈 안이 완전히 검었다. 오른쪽 사진에서는 검은 층 아래의 절개선이 희미하게 살아났다. 상형문자의 일부였다.

도윤은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 갈대잎, 원형의 태양, 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형상. 완전한 글자는 아니었지만 남은 순서만으로도 특정할 수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왕의 이름이 아니었다. 여러 신전과 석비에서 반복되는, 이집트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 태겸이 먼저 말했다.

“이걸 지워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왕명 말살의 관점에서는 없습니다.”

도윤이 대답했다. 그는 두 이미지를 번갈아 보았다.

“후대 왕조가 적대시했던 왕도 아니고, 종교개혁이나 왕위찬탈과 직접 연결된 인물도 아닙니다. 이 이름이 남아 있다고 해서 정치적인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에 지운 게 아니겠군.”

주원이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유세프가 다른 화면을 열었다. 현미경으로 촬영한 표면사진이었다. 검은 층의 단면이 여러 배로 확대되어 있었다. 가장 아래에는 석회암이 있었고, 그 위에 푸른 안료와 얇은 투명층, 다시 검은색 층이 겹쳐 있었다. 검은 층 가장자리에는 붓의 섬유가 지나간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푸른 안료는 이집션 블루입니다. 고대 층과 일치합니다. 그 위의 투명층은 후대의 보강제이고, 검은 층에는 탄소계 안료와 셸락 계열 수지가 포함돼 있습니다.”

태겸이 물었다.

“연대는 어느 정도로 볼 수 있습니까?”

살마가 대신 대답했다.

“정확한 제작연대를 성분만으로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고대층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셸락을 사용한 보존처리와 표면도장은 근대 이후에 흔해졌습니다.”

“그럼 누군가 복원하면서 잘못 칠한 겁니까?”

카림이 물었다. 살마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실수였다면 주변까지 묻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검은 층은 절개선 안쪽을 따라 들어가 있습니다. 먼저 표면을 가볍게 연마한 뒤, 문자 부분에만 검은 물질을 넣었습니다.”

도윤은 석재를 다시 보았다. 고대의 왕명 말살은 대개 난폭했다. 정과 망치로 얼굴과 이름을 찍어내고, 글자의 형태 자체를 돌에서 없애려 했다. 대상이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읽을 수 없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이 돌 위에 새겨졌다는 사실까지 파괴해야 했다.

그러나 눈앞의 카르투슈는 달랐다. 돌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문자의 홈도 남아 있었다. 검은 층만 제거하면 이름은 다시 나타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없애려 한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게 만들려 했다.

“언제 박물관에 들어왔습니까?”

도윤이 물었다. 유세프는 책상으로 돌아가 종이서류 몇 장을 가져왔다.

“공식 등록은 1901년입니다. 출토지는 아비도스, 발견연도는 1898년. 발굴단이 현지 보관소에 두었다가 카이로로 옮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서류를 내려놓았다. 타자기로 작성한 오래된 등록카드의 복사본이었다.

– PROVENANCE: ABYDOS

– DATE OF DISCOVERY: 1898

– TRANSFERRED: 1901

“발굴보고서는요?”

태겸이 물었다.

“없습니다.”

“물품목록은?”

“없습니다.”

“현장사진은?”

“없습니다.”

태겸은 등록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도 출토지는 확정되어 있군요.”

“그렇습니다.”

유세프는 두 번째 종이를 꺼냈다. 같은 유물에 관한 더 오래된 기록이었다. 손으로 적힌 짧은 목록의 일부였고, 문장보다는 숫자와 약어가 많았다. 상단에는 정식 등록번호가 아닌 임시번호가 적혀 있었다.

17B

출토지 항목에는 한 단어만 있었다.

UNKNOWN 미상.

“이 기록은 1899년에 작성됐습니다.”

유세프가 말했다.

“발견됐다고 기재된 해보다 일 년 뒤인데도 출토지는 미상입니다. 그런데 1901년 정식 등록카드에서는 아비도스로 확정됩니다.”

주원이 물었다.

“그 사이에 새로운 기록이 발견됐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유세프는 세 번째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것 하나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종이 위에는 서로 다른 네 점의 유물이 정리되어 있었다. 작은 석재 부조, 조각상의 받침대, 제의용 석판 일부, 또 다른 카르투슈 파편이었다. 시대도 형태도 달랐다. 공식 출토지도 달랐다.

– 아비도스.

– 덴데라.

– 에드푸.

– 출토지 미상의 개인 기증품.

그러나 최초 임시등록표에는 네 점 모두 출처 미상으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정식 등록 과정에서 서로 다른 출토지가 부여되었다. 유세프는 각각의 현미경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모든 유물의 특정 문자나 상징 위에 검은 층이 남아 있었다.

“성분이 같은 겁니까?”

도윤이 물었다. 살마가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보관환경과 후대처리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탄소안료, 셸락 계열 수지, 소량의 침엽수성 수지 성분이 반복됩니다. 도포방식도 유사합니다.”

“한 사람이 한 겁니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같은 작업장에서 처리됐을 가능성은요?”

“배제할 수 없습니다.”

카림은 종이들을 내려다보다가 유세프에게 물었다.

“이게 아버지가 말하던 유물들이야?”

유세프는 잠시 침묵했다.

“일부는.”

“일부라는 건?”

“아버지가 남긴 번호와 일치하는 것이 두 점 있었어.”

“수첩에 이 물건들이 적혀 있었어?”

“정확한 물건은 아니야. 정식 등록번호가 생기기 전의 임시번호만 있었어.”

카림의 표정이 굳었다.

“그 수첩을 언제 봤어?”

“오래됐어.”

“내가 가진 것 말고 또 있었나?”

“아버지가 복사해 둔 페이지가 있었어.”

두 사람의 말투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사용하던 영어가 아니라 아랍어였다. 도윤은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만, 카림의 목소리가 낮아질수록 감정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살마가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다툼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잠시 뒤 카림이 다시 영어로 말했다.

“형, 아버지의 기록을 검증하려는 건지, 아버지가 옳았다고 증명하려는 건지 먼저 결정해야 해.”

“둘이 다르지 않다면?”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분석을 했어. 수첩만 믿었다면 이 사람들을 부르지도 않았겠지.”

“아냐. 형은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자료를 모으고 있어.”

유세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몰라.”

그는 검은 카르투슈 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아버지가 틀렸기를 바라.”

카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세프는 손바닥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짚었다.

“아버지는 누군가 유물의 라벨을 바꾸고 있다고 주장했어. 실제 발견지와 정식 등록지가 다르다고 했지. 당시에는 근거가 없었어. 단지 복사본 몇 장과 임시번호, 출처가 불분명한 수첩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모두 아버지가 기록을 혼동했거나, 자신이 잃어버린 라벨을 숨기려 한다고 생각했어.”

카림이 차갑게 말했다.

“모두가 아니라, 조사위원회가 그렇게 판단했지.”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어.”

유세프의 말에 카림의 시선이 멈췄다. 유세프는 피하지 않았다.

“나도 믿지 않았어. 적어도 처음에는.”

방 안에는 환기장치와 분석기기의 낮은 소리만 남았다. 유세프는 다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번 것은 현대의 데이터베이스 화면을 인쇄한 것이었다. 유물번호와 출토지, 소장 이력 아래에 여러 개의 이전 값이 날짜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첫 등록 당시에는 ‘미상’.

두 번째에는 ‘상이집트’.

세 번째에는 ‘아비도스 추정’.

마지막에는 ‘아비도스, 1898년 발굴’.

불확실했던 기록이 수정될 때마다 더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구체성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문서가 추가된 흔적은 없었다. 태겸이 말했다.

“보통은 반대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이요?”

“처음에 구체적인 기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며 일부가 유실되는 쪽이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장소와 연도가 생기고 있습니다.”

유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요?”

유세프는 모니터 앞으로 돌아갔다.

“그 구체적인 기록이 지금도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그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자 로그인 화면이 나타났다. 유세프는 출입증을 단말기에 대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화면 상단에는 마아트 재단의 흰 깃털 문양과 함께 통합기록 이관시험이라는 글자가 표시되었다. 도윤은 책상 위에 놓인 인쇄물을 보았다.

“그래서 전부 종이로 뽑아둔 겁니까?”

“종이가 안전해서가 아닙니다.”

유세프가 말했다.

“적어도 종이는 내가 보고 있는 동안 글자가 바뀌지는 않으니까요.”

그는 문제의 유물번호를 검색했다. 잠시 뒤 화면에 석재 파편의 사진과 등록정보가 나타났다.

– PROVENANCE: ABYDOS

– DISCOVERY DATE: 1898

– ACCESSION: 1901

유세프가 아래로 스크롤했다. 일반 연구자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오래된 필드들이 회색 글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 LEGACY TEMPORARY NUMBER: 17–B

– INITIAL PROVENANCE: UNKNOWN

– FIRST STORAGE LOCATION: SOUTH MAGAZINE / UNVERIFIED

도윤은 인쇄물과 화면을 비교했다. 내용이 같았다.

“이 화면은 누가 볼 수 있습니까?”

“현재는 통합사업 기술팀과 각 기관의 관리자, 승인된 출처연구자만 볼 수 있습니다.”

“마아트 재단도요?”

주원이 물었다.

“기술지원 권한이 있습니다.”

“수정도 할 수 있고?”

“원칙적으로는 기관 승인 없이 수정할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유세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겸이 화면의 수정이력 버튼을 가리켰다.

“이전 기록을 누가 바꿨는지는 나옵니까?”

유세프가 버튼을 눌렀다. 새 창이 열렸다. 날짜와 사용자 계정, 수정 항목이 표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최근 몇 달 동안 대부분의 변경은 시스템 이관 또는 형식 표준화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초 출토지에 관한 과거 수정은 사용자명이 비어 있었다.

– USER: NOT AVAILABLE

“오래된 기록이라서 그렇습니까?”

도윤이 물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유세프는 창을 닫고 다른 유물의 기록을 열었다. 이번에는 덴데라 출토로 등록된 석판이었다. 최초 기록은 ‘출토지 미상’이었지만, 최근 화면에는 그 항목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책상 위의 인쇄물을 옆에 놓았다. 인쇄물에는 분명히 있었다.

INITIAL PROVENANCE: UNKNOWN

화면에는 없었다.

“언제 출력했습니까?”

“사흘 전입니다.”

“그 사이에 이관 형식이 바뀐 것은 아닙니까?”

살마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유세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물었습니다. 임시등록지와 최초 출처 필드가 일부 화면에서 사라졌다고.”

“뭐라고 했습니까?”

“오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음 날에는 내가 문의한 기록도 사라졌습니다.”

살마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적어도 내게는 말했어야 합니다.”

“당신이 기술팀에 문의했을 테니까요.”

“당연히 문의했겠지요.”

“그래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살마가 유세프를 바라보았다. 화가 났다기보다 그가 얼마나 오래 혼자 움직였는지를 이제야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주원이 물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지운다고 생각합니까?”

유세프는 화면을 보며 말했다.

“지운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럼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는 겁니다.”

“차이가 있습니까?”

“데이터는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누구도 접근할 수 없고, 새 기록과 대조할 수도 없게 되는 거죠. 그러면 행정적으로는 보존된 겁니다.”

태겸이 로비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문헌학적으로는 사라진 것이고요.”

유세프가 태겸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도윤은 검은 카르투슈를 돌아보았다. 왕의 이름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돌에서 긁어내지 않았다. 검은 층 아래에 온전히 남겨두었다.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상태. 필요하다면 언젠가 다시 꺼낼 수 있으나, 허락받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이름을 지운 게 아니군요.”

도윤이 말했다. 유세프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무슨 뜻입니까?”

“검은 층을 바른 사람은 왕의 이름을 파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없애고 싶었다면 정으로 찍어냈을 겁니다. 이건 읽지 못하게만 덮었습니다.”

“왜요?”

“돌이 무엇인지 판단할 근거를 하나 없앤 겁니다.”

도윤은 등록카드를 집어 들었다.

“왕명이 보이면 시대와 왕조를 특정할 수 있습니다. 주변 문구와 양식이 남아 있다면 원래 있던 장소도 좁힐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름을 덮어버리면 물건은 불완전한 파편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돌이 아니라 라벨을 믿게 됩니다.”

유세프가 아무 말 없이 도윤을 바라보았다. 주원이 석재 뒷면을 가리켰다.

“벽에서 떼어낸 흔적도 라벨만으로는 알 수 없고.”

태겸이 덧붙였다.

“문장의 앞뒤가 없으면 출처를 반박하기도 어렵겠지.”

유세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발견을 공유한 사람의 흥분이 없었다. 자신이 두려워하던 결론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피로만이 남았다.

“이것 하나만이었다면 우연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복원가의 과잉처리, 소장자의 취향, 오래된 전시를 위한 도색. 어떤 설명이든 붙일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검게 덮인 유물들이 있고, 그 유물들은 모두 출처가 바뀌었습니다.”

카림이 물었다.

“몇 점이나?”

“확인한 것만 여섯 점.”

“전부 여기 있어?”

“네 점은 이 박물관과 지역 수장고에 있고, 한 점은 유럽의 대학 박물관, 다른 한 점은 사설 컬렉션에 있어.”

“해외에 있는 물건의 성분을 어떻게 확인했어?”

“과거 보존보고서와 시료분석 기록을 받았어.”

살마가 말했다.

“정식 공동연구로 받은 자료입니다. 적어도 그 부분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쪽도 출토지가 바뀌었습니까?”

태겸이 물었다. 유세프가 다른 폴더를 열었다.

“둘 다 최초 소장기록에는 ‘이집트에서 입수’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한 점은 나중에 아비도스 출토로, 다른 한 점은 룩소르 인근의 개인 발굴품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가 바꾼 겁니까?”

“그걸 찾으려 했습니다.”

“찾았습니까?”

유세프는 잠깐 모니터 오른쪽 아래를 보았다. 화면에는 작은 알림창이 떠 있었다.

LEGACY DATA SYNCHRONIZATION IN PROGRESS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알림창을 닫았다.

“아직은 아닙니다.”

“통합시스템 가동까지 열흘 남았다고 했지요.”

도윤이 말했다.

“그 이후에는 이 화면을 볼 수 없습니까?”

“최종 출처기록은 볼 수 있습니다.”

“최초 기록은요?”

“별도 보관됩니다.”

“누가 접근할 수 있습니까?”

유세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살마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십 분 지났습니다.”

“조금만 더.”

“야간 보안점검이 시작됩니다.”

유세프는 화면에서 문제의 첫 번째 유물기록으로 돌아갔다. 그는 인쇄물과 화면을 다시 나란히 놓았다.

“이것만 확인하고 끝내겠습니다.”

“무엇을요?”

유세프는 최초 임시등록지 항목을 가리켰다.

– INITIAL PROVENANCE: UNKNOWN

“제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이 필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관대상에서는 제외된 항목이지만 아직 원본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었어요.”

도윤이 물었다.

“오늘도 그대로인데요.”

“지금은 그렇습니다.”

유세프는 수정이력 창을 다시 열었다. 최근 변경사항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화면을 인쇄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린터가 반응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명령을 보냈다. 이번에도 아무 소리가 없었다. 살마가 책상 아래의 연결선을 확인했다.

“네트워크 프린터가 끊겼습니다.”

“이런…로컬로 저장해야겠습니다.”

유세프가 파일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 한가운데에 경고창이 나타났다.

– ACCESS DENIED

“형 계정인데도?”

카림이 물었다. 유세프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똑같은 문구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화면이 짧게 깜빡였다. 열려 있던 수정이력 창이 닫히고, 유물정보 페이지가 처음부터 다시 불러와졌다. 도윤은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진과 등록번호, 출토지와 발견연도는 그대로였다. 모든 정보가 조금 전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다만 한 줄이 사라져 있었다.

– INITIAL PROVENANCE: UNKNOWN

최초 출처 항목 자체가 없어졌다. 빈칸으로 남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필드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음 항목들이 위로 당겨져 있었다. 태겸이 인쇄물을 들어 화면 옆에 댔다.

“방금 전까지 있었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유세프가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항목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른 유물기록을 열었다. 처음에는 ‘출토지 미상’이었다가 덴데라로 바뀐 석판이었다. 그 기록에서도 최초 출처 필드가 사라져 있었다. 세 번째 기록과 네 번째 기록 역시 같았다. 살마가 자신의 출입카드를 단말기에 대고 관리자 화면을 열었다.

“이관작업 중 필드가 숨김처리됐을 수 있습니다.”

“아뇨. 예정된 작업이 아닙니다.”

유세프가 말했다.

“오늘 밤 표준화 작업이 있어요?”

“없습니다.”

살마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적어도 내 일정에는 없습니다.”

“변경기록을 보세요.”

유세프가 말했다. 살마는 관리자 메뉴에서 감사기록을 열었다. 방금 이루어진 변경이 목록 최상단에 나타났다. 수정 시각은 20시 47분. 그들이 화면을 보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MODIFIED FIELD: LEGACY PROVENANCE

ACTION: ARCHIVED

AUTHORIZED USER: Y. LATIF

카림이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유세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이 한 거야?”

유세프의 두 손은 키보드에서 떨어져 있었다.

“아니.”

살마가 접속 위치를 열었다. 잠시 로딩 표시가 돌아갔다.

TERMINAL: ADMIN–EAST–04

행정동 동쪽 4층. 이 영상분석실과는 건물 반대편이었다. 유세프의 계정이 그곳에서 접속 중이었다. 살마가 다급하게 관리자 차단버튼을 눌렀다. 화면 상단의 흰 깃털 문양이 사라지고 강제 로그아웃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변경은 끝난 뒤였다. 유세프는 모니터와 책상 위의 인쇄물을 번갈아 보았다. 종이에는 조금 전까지 존재했던 한 줄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INITIAL PROVENANCE: UNKNOWN

그는 놀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품어온 의심이 눈앞에서 증명된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제 보셨죠.”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 한가운데에서 짧은 문구가 한 번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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