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예요. 도라미.”
라미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진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는 짧았다. 정중하다기보단, 상대가 누군지 슬쩍 확인하는 가벼운 접촉에 지나지 않았다.
“진혁입니다.”
진혁은 자기도 모르게 라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라미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말투도, 표정도, 어디서든 볼 법한 사람 같아서, 첫인상만 놓고 보면 가온이 싫어할 이유가 없어 보일 만큼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라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여기 와서야… 함께 계신다고 들었거든요.”
말끝은 부드러웠지만, 라미의 시선이 잠깐 가온을 스쳤다. 가온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 사이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선 절대 가질 수 없는 낯선 온도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진혁이 조심스레 답했다.
“저도 오신다는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었으니까요. 그보다… 정말 유감입니다.”
라미는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웃음이 있었지만, 눈동자엔 울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여기 왜 온 거야?”
가온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잠시 만들어졌던 부드러운 공기를 산산이 깨뜨렸다. 라미가 팔짱을 낀 채로 몸을 가온 쪽으로 틀었다.
“네가 하려는 일.”
라미가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하려고.”
가온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내가 뭘 하려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진혁은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숨을 삼켰다. 이 대화는 지금 막 시작된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스라엘’, 가만둘 생각 없잖아.”
짤막한 침묵.
“아버지랑 형이 그들 손에 그렇게 됐는데.”
가온은 말없이 라미를 바라봤다. 단단한 눈빛, 굳은 입술. 진혁은 뒤늦게 물었다.
“아버지요?”
라미가 놀란 표정으로 가온을 보았다.
“아… 가온이, 아버지 얘긴 안 했나 보네요.”
가온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굳었다.
“우리 아버지도… 이스라엘 때문에 돌아가셨어.”
담담히 내뱉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살을 파고 들었다.
“형이랑은 또 이유가 달라.”
가온은 의자에 앉으며 두 사람에게도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진혁과 라미가 마주 보고 앉았다. 방 안은 왠지 더 좁아 보였다. 가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오랜 신자였어. 교회 일이 생기면 뭐든 제쳐두고 달려가던 분이었지. 내가 솔직히, 집에서 아버지 얼굴 본 기억이 별로 없어.”
말을 멈춘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저 멀리 먼 기억을 붙잡는 눈빛을 보였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 돌아가셨고, 집엔 형이랑 나, 둘뿐이었어.”
말을 하면서도 그때의 냄새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낡은 집, 밤마다 울던 형의 목소리, 텅 빈 식탁. 가온은 잠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1999년 7월 24일.”
가온이 말을 이었다.
“그때 이스라엘이 ‘종말 집회’를 열었어. 나중에 자기들은 그걸 제1차 부흥회라고 부르더라.”
그의 눈이 먼 곳을 바라봤다.
“그 집회에서… 우리 아버지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셨어.”
진혁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라미는 고개를 숙였다. 가온은 더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억눌린 듯 짧게 끊으며 말했다.
“라불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하늘로 올라갈 때 양옆에 두 명씩, 네 명의 천사가 시중드는 그림이 나와. 이스라엘 쪽 사람들은, 종말 때 내려온다는 재림예수도 그 네 천사와 다시 올라간다고 믿거든.”
진혁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잠깐… 그럼 이스라엘 교주랑, 종말에 온다는 재림예수는 다른 사람이야?”
가온이 짧게 웃었다.
“그게 이상한 점이지.”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가며 설명했다.
“그 사람들은 예수를 육으로 온 예수, 영으로 온 예수 둘로 나눠. 자기네 교주는 ‘육의 예수’고, 종말땐 ‘영이 임한다’고 해. 교주는 그릇일 뿐이고, 재림 때는 영이 그에게 들어간다는 식이지.”
진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아버지가—”
“천사로 뽑혔다는 놈들 중 한 명이었어.”
가온이 말을 잘랐다.
“한마디로, 제물인 셈이지.”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가온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는 말을 돌렸다.
“그래. 라미, 네 말대로야. 난 이스라엘을 그냥 두고 볼 생각 없어.”
가온이 진혁을 흘끗 바라봤다.
“그리고… 진혁도 마찬가지야.”
진혁의 눈이 번쩍 커졌다.
“내가?”
이번엔 가온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더이상 농담 따윈 없었다.
“말했잖아. 넌 이제 이 일에 휘말렸어.”
진혁은 목이 잠깐 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그 틈을 타 가온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네가 나를 돕는 게 아니라…”
그가 말을 잠시 멈췄다.
“우리 둘 다 살아남으려면 함께 움직이는 수밖에 없어. 아무튼, 라미.”
가온이 라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이 너한테 맡겼다는 게 뭐였지?”
라미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납작한 투명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는 SD카드와 리더기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아직 확인 못 해 봤어.”
라미가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절대 열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거든. 나한테 맡겼다는 게 이게 다야.”
말을 마치고 라미는 가온을 빤히 쳐다봤다.
“이제 네 차례야.”
가온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시온이 맡겼던 스마트폰을 꺼내, 책상 위에 살짝 올려두었다.
“이건 형이 나한테 맡겼던 거야.”
가온은 잠깐 망설이더니, 책상 위 검은 케이스도 들어보였다.
“그리고 이건… 형이 몰래 숨겨둔 성물들 중 하나야.”
라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진혁한테 옮겨갔다.
“그런데 그게 왜 진혁씨 손에 있었던 거죠?”
진혁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저… 집 앞 육교 밑에서 주웠어요.”
진짜로 주운 게 맞았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 왠지 변명처럼 느껴졌다. 라미는 잠시 진혁을 쳐다봤다. 의심하기보다, 그저 사람을 헤아려보는 눈빛이었다. 가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확인했어. 진혁은 이스라엘 쪽 사람이 아니야.”
라미는 말없이 케이스를 열어 안을 살폈다.
“이거… 펜이네요?”
“겉으론 그렇지.”
가온이 케이스 안에서 펜을 꺼내 보이며 안쪽을 보여줬다. 라미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긴장도 아니고, 막힌 게 뚫린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라미의 시선은 곧 케이스 바닥으로 쏠렸다. 반짝이는 금색 글자. 히브리어다. 라미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히브리어 맞네.”
가온이 멈칫했다.
“읽을 수 있겠어?”
라미는 스마트폰을 꺼내 성경 앱을 열었다.
“대충은.”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금세 번역문을 찾아 두 사람에게 보여줬다.
‘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덥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
이사야 47:14
가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령이 아니라… 성경 구절인데?”
라미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한다.
“지령치고는 너무 상징적인데.”
진혁이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럼… SD카드부터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게 오빠가 직접 남긴 거라면, 여기 더 구체적인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요.”
가온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진혁은 SD카드를 받아 컴퓨터에 꽂았다. 다행히 리더기도 함께 있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잠시 컴퓨터에 인식되는 동안, 방 안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정말로, 뭔가 드러날 차례였다. 모니터에 폴더 하나가 떠올랐다. 두 개의 동영상, 두 개의 문서가 파일 형태로 들어 있었다. 진혁은 마우스 위에 손을 올린 채, 잠깐 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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