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2025년 11월 9일, 카이로

카이로의 공기는 비행기 문이 열리기 전부터 기내에 스며들어 있던 것 같았다. 서도윤은 탑승교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 냄새부터 맡았다. 먼지와 마른 흙, 오래 가동된 냉방장치에서 나는 금속성 냄새가 한데 섞여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 외투 깃을 세워야 했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지만, 이곳의 공기는 늦가을이라는 말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한주원이 바로 뒤에서 가방 끈을 고쳐 멨다.

“생각보다 덥네.”

그는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해 지면 달라질 거야.”

윤태겸이 대답했다. 그는 입국 서류를 여권 사이에 끼워둔 채 사람들의 흐름을 살피고 있었다.

“낮 기온 보고 옷 입으면 밤에 후회한다더라.”

주원이 고개를 돌렸다.

“카이로에 와본 사람처럼 말하네.”

태겸은 그에게 자신의 손에 들린 여행 가이드북을 들어 보였다.

“오기 전에 읽었으니까.”

“넌 어디 갈 때마다 날씨부터 논문처럼 보더라.”

태겸은 대꾸하지 않았다. 주원이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다시 앞을 보았다. 세 사람은 입국심사대 앞에서 서로 다른 줄에 섰다. 유리벽 너머로 아랍어와 영어 안내방송이 번갈아 울렸고, 천장 가까이에 설치된 화면에서는 대형 문화유산 사업의 홍보영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사막 위로 드론이 날았고 신전의 기둥과 왕의 얼굴,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작은 목걸이가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에는 흰 깃털을 형상화한 문양이 화면 가운데 나타났다.

MA’AT HERITAGE FOUNDATION

그 아래 아랍어와 영어로 같은 문장이 적혔다.

ONE HERITAGE. ONE RECORD.

하나의 유산. 하나의 기록.

도윤은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여권을 내밀었다. 심사관은 입국 목적을 물었다. 국제 학술행사라고 답하자 행사명을 다시 확인했고, 도윤이 건넨 초청장을 훑어본 뒤 별다른 질문 없이 도장을 찍었다. 짧고 둔탁한 소리가 여권 위에 남았다.

수하물 벨트 앞에는 이미 주원이 서 있었다.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여행가방을 눈으로 좇다가 손잡이를 잡아 끌어내렸다.

“태겸이 건 아직 안 나왔어?”

도윤이 주원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저기 온다.”

어느덧 옆에 와서 선 태겸이 고갯짓으로 자신의 짐을 가리켰다.

“너희 둘은 짐도 꼭 성격대로더라. 네 건 제일 늦고, 도윤이 건 제일 먼저 나오고.”

주원이 키득거리며 태겸을 툭 쳤다.

“가방에 성격이 어디 있어.”

태겸은 툴툴 거리며 자신의 짐을 들었다.

“오래 보다 보면 그런 것도 보여.”

“건축물은 안 보고 가방만 보고 살았나 보네.”

주원은 대답 대신 웃었다.

태겸의 가방까지 찾고 입국장 밖으로 나왔을 때, 카림 라티프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눈에 띄었다. 검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한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고, 반대편 팔에는 입지 않은 재킷을 걸쳐두었다. 수염은 예전보다 조금 길어졌고, 관자놀이 부근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흰빛이 섞여 있었다. 그는 먼저 도윤을 끌어안았고, 주원의 어깨를 두드린 다음 태겸과 악수했다.

“오래 걸렸지?”

한국어는 여전히 자연스러웠다. 다만 문장 끝에 남는 억양은 서울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보다 조금 짙어져 있었다.

“비행기보다 입국심사가 더 길었어.”

주원이 말했다.

“형은?”

도윤이 묻자 카림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늦게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보였다.

“박물관에 있어. 자기가 오겠다고 해놓고 결국 안 나왔어.”

“이 시간까지?”

“요즘은 거의 거기서 살아.”

카림이 세 사람의 짐을 살피며 손을 내밀었다. 주원이 자기 가방을 끌어당겼다.

“됐어. 어디로 가면 돼?”

“주차장이 멀어졌어. 따라와.”

그들은 출국장과 입국장 사이의 넓은 통로를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공항 곳곳에 같은 흰 깃털 문양이 붙어 있었다. 전광판에는 통합기록망 가동일까지 남은 날이 숫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11 DAYS’

주원이 걸음을 늦췄다.

“저게 이번 세미나에서 다루는 사업인가?”

카림이 뒤를 돌아보았다.

“직접적인 주제는 아니야. 그래도 참석자 절반은 저 사업 때문에 온 사람들이고.”

“무슨 기록을 통합하는데?”

“국립박물관, 지역 수장고, 발굴기관에 흩어진 유물 등록기록. 출토지, 최초 등록번호, 이동 경로, 복원 이력. 기관마다 양식이 다르니까 하나로 묶는 거지.”

태겸이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기록은 하나일 필요가 없는데.”

카림이 짧게 웃었다.

“당연히 문헌학자는 그렇게 말하겠지.”

“그럼, 행정은 다르게 생각하나?”

“행정은 같은 물건이 세 개의 번호를 갖는 걸 싫어해.”

“역사는 가끔 그 세 개가 다 필요하고.”

카림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래서 형이 잠을 안 자는 거야.”

그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지만, 도윤은 카림이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는 공항도로를 지나 서쪽으로 향했다. 해는 이미 건물 뒤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도시는 모래빛과 회색의 경계에서 길게 펼쳐져 있었다. 미완성 건물의 철근들이 하늘을 향해 드러나 있었고, 오래된 아파트 외벽에는 위성안테나가 층마다 붙어 있었다. 도로 위에서는 승용차와 버스, 짐을 가득 실은 소형 화물차가 좁은 틈을 밀고 들어왔다.

“형 연구가 통합기록하고 관계 있어?”

도윤이 물었다. 카림은 앞차와의 간격을 좁히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형은 보존 처리 쪽이고, 통합 사업은 출처기록 쪽이니까 원래는 다른 분야야. 그런데 재분류하면서 표면분석이 다시 필요한 유물이 많아졌어. 출토지가 불분명하거나 복원 이력이 비어 있는 것들.”

“그래서 형이 맡았고?”

“처음에는 그랬지.”

주원이 조수석에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지금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카림은 대답하기 전에 차선을 하나 옮겼다. 창밖으로 흰 깃털이 그려진 대형 광고판이 지나갔다. 사암 조각 하나가 검은 배경 위에 떠 있었고, 그 아래에는 공항에서 본 것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나의 유산. 하나의 기록.

“형이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는 재주가 있잖아.”

카림이 말했다.

“원래 맡은 것만 보면 되는데, 왜 기록이 바뀌었는지까지 보려고 하니까.”

“바뀐 게 있어?”

도윤이 앞으로 몸을 당기며 물었다.

“형한테 직접 들어. 내가 설명하면 또 틀렸다고 할 거야.”

“둘이 아직도 그러냐?”

주원이 물었다.

“뭘?”

“네가 먼저 말하면 형이 정정하고, 형이 먼저 말하면 네가 과장이라고 하고.”

카림의 손가락이 운전대 위에서 한 번 움직였다.

“그때랑은 좀 달라.”

차 안에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카림이 마지막으로 한국에 왔을 때도 유세프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아버지 하산 라티프의 이름은 더욱 드물게 나왔다. 서울에서 함께 공부하던 시절, 카림이 술자리나 늦은 밤 연구실에서 가족 이야기를 꺼낸 적은 있었지만 늘 중간에서 멈췄다. 하산이 박물관에서 어떤 일을 했고, 왜 그만두었으며, 그 일이 가족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는 조각난 문장으로만 들었다. 유세프는 그 조각들을 다시 맞추려 했고, 카림은 그럴수록 가족이 같은 자리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가 도윤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숙소는 기자 지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낮은 건물이었다. 국제행사 참석자들을 위해 마련된 연구자 숙소로, 외벽은 새로 칠했지만 안쪽 계단과 창틀에는 오래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로비 벽에는 세미나 일정표와 참가자 출입증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통합기록 사업을 후원하는 기관들의 로고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마아트 재단의 흰 깃털은 가장 위에 있었다.

객실은 각각 따로 배정되어 있었다. 짐을 풀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자 카림은 숙소 식당이 아니라 근처의 작은 식당으로 세 사람을 데려갔다. 관광객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 플라스틱 의자와 금속 테이블이 좁은 간격으로 놓여 있었고, 벽에서는 오래된 선풍기가 느리게 돌아갔다.

카림은 따로 메뉴를 묻지 않고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빵과 구운 고기, 향신료를 넣은 콩 요리와 채소가 금세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형은 온대?”

태겸이 물었다. 카림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온다고는 했어.”

“몇 시에?”

“그 말은 안 했고.”

“역시 형제네.”

주원의 말에 카림이 눈을 들었다.

“무슨 뜻이야?”

“시간을 말하지 않고 약속하는 방식이 닮았다고.”

“나는 시간 잘 지켜.”

“한국에서만 그랬나 보네.”

카림이 빵 조각을 주원 쪽으로 던지는 시늉을 했다가 그만두었다. 잠깐이나마 예전의 표정이 돌아왔다.

그들은 세미나 일정과 발표 순서, 박물관에서 만나게 될 연구자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도윤은 ‘왕명 훼손과 정치적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할 예정이었고, 주원은 신전 이전과 복원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간적 맥락의 변화에 관한 토론자로 초청받았다. 태겸은 19세기 비문 필사본의 오류와 전승 문제를 다룰 예정이었다. 세 사람의 연구 분야는 달랐지만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하나의 기록이 다른 시대를 거치며 어떻게 바뀌는지, 무엇이 남고 무엇이 빠지는지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보는 사람들이었다.

카림이 유세프에게 연락을 한 것은 식사가 거의 끝났을 때였다. 한 번은 받지 않았다. 두 번째 통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세 번째에는 전화가 끊기기 직전 상대가 받은 것 같았지만, 카림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채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왜?”

도윤이 물었다.

“받았는데 말이 없어.”

카림은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박물관 안쪽은 통신이 나쁠 때가 있어.”

그가 말했다. 누구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카림은 로비에 남아 형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도윤과 주원, 태겸도 각자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한쪽의 낡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로비의 텔레비전에서는 소리를 낮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 아래 자막으로 통합기록망 가동 준비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문장이 흘렀다. 기록 이관율, 참여 기관 수, 디지털화된 유물 건수가 숫자로 표시되었다. 태겸은 한동안 화면을 보다가 말했다.

“저런 숫자는 많을수록 불안해.”

주원이 물었다.

“왜?”

“얼마나 많이 옮겼는지는 말해주는데, 뭘 버렸는지는 안 말하니까.”

“버리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카림이 대답했다. 그는 소파에 앉지 않고 유리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

“기존 기록도 보존돼. 다만 통합 이후에는 새 번호가 우선하고, 옛 필드는 별도 보관으로 넘어가.”

태겸이 고개를 들었다.

“누가 접근할 수 있는데?”

카림은 잠시 생각했다.

“기관 관리자, 승인된 연구자, 재단 기술팀.”

“일반 연구자는?”

“통합된 최종기록만 보게 되겠지.”

“그럼 없어진 건 아니지만 볼 수도 없는 기록이 되는 거네.”

“행정적으로는 보존된 거야.”

“문헌학적으로는 사라진 거고.”

카림은 답하지 않았다.

유리문 바깥으로 차 한 대가 들어온 것은 열 시 사십 분이 넘어서였다. 오래된 흰색 택시가 건물 앞에 멈추었고, 뒷문에서 키가 큰 남자가 내렸다. 카림이 문을 열고 나갔다.

유세프 라티프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말라 있었다. 짙은 회색 정장 위에 걸친 코트는 한쪽 어깨가 구겨져 있었고, 셔츠 소매 끝에는 검은 얼룩이 조금 묻어 있었다. 수염은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눈 아래의 그늘이 짙었다. 그는 동생과 짧게 포옹한 뒤 안으로 들어왔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세프와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화상회의에서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었다.

“서 박사.”

유세프가 영어로 말했다. 그 뒤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영어로 이어졌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직접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연구실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문제는 늘 있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많았을 뿐이지요.”

유세프는 주원과 태겸에게도 차례로 인사했다. 두 사람의 연구를 이미 읽었다는 말을 덧붙였고, 형식적인 칭찬이 아니라는 듯 발표 제목과 논문의 세부 내용을 정확히 언급했다. 그는 빈 소파에 앉으려다가 로비 유리문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택시는 이미 떠난 뒤였다. 밖에는 주차된 차 몇 대와 가로등 아래의 먼지만 보였다. 유세프는 코트를 벗지 않았다. 카림이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거짓말하지 마.”

“커피 마셨어.”

“그건 저녁이 아니야.”

유세프는 동생을 보며 짧게 웃었다. 지친 얼굴에 웃음이 나타났다 금세 사라졌다.

“내일 먹지.”

그는 테이블 위에 얇은 검은색 서류철을 올려놓았다. 로고도 제목도 없는 것이었다. 잠금장치는 없었지만, 유세프는 손을 그 위에 둔 채 바로 열지 않았다.

“서 박사의 발표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가 도윤에게 말했다.

“왕의 이름을 지우는 행위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후대의 질서 안에서 그 왕이 차지할 자리를 다시 정하는 일이라는 부분 말입니다.”

“제 생각이라기보다는 오래된 논의입니다.”

“음…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래된 논의가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도윤이 묻자 유세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떠 있었지만,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유세프는 전화를 진동으로 바꾼 뒤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았다.

“통합기록 사업 때문에 최근 몇 달 동안 수장고의 유물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사진이 오래되었거나, 복원 이력이 불완전하거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카르투슈가 훼손된 유물도 있었고요?”

유세프가 도윤을 바라보았다.

“카림이 말했습니까?”

“아니요. 단지 발표 주제로 저를 부른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유세프는 손가락으로 서류철 표면을 한 번 쓸었다.

“저도 처음에는 왕명을 지운 흔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고대에 있었던 훼손이거나, 발굴 이후의 부주의한 복원.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둘 다 아니었습니까?”

“내일 직접 보는 편이 낫습니다.”

“형.”

카림이 낮게 불렀다.

“사람을 한국에서 불러놓고 또 절반만 말할 거야?”

유세프의 시선이 동생에게 옮겨갔다.

“나조차도 절반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어.”

“그럼 확인될 때까지 기다렸어야지.”

“기다리면 없어질 수 있으니까 불렀어.”

로비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숫자와 도표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누구도 화면을 보지 않았다. 카림이 물었다.

“뭐가 없어져?”

유세프는 검은 서류철을 열었다. 안에는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니라 사진 한 장만 들어 있었다. 그는 사진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등불이 아니라 차가운 연구실 조명 아래에서 촬영한 석재 파편이었다. 표면에는 타원형의 카르투슈가 있었고, 그 안쪽은 검은 물질로 덮여 있었다. 긁힌 흔적도, 정으로 깨뜨린 자국도 없었다. 검은 층은 이름이 새겨진 홈을 따라 지나치게 정교하게 채워져 있었다. 도윤은 사진을 들어 가까이 보았다.

“그을음은 아니군요.”

“아닙니다.”

“안료입니까?”

“안료도 있지요. 그러나 안료만은 아닙니다.”

“연대는요?”

유세프가 대답하기 전에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몇 초 뒤 전화가 다시 울리자 이번에는 카림도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유세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한숨을 몰아쉬고는 전원을 완전히 꺼버렸다.

“내일 저녁 박물관이 문을 닫은 뒤에 오십시오.”

그가 말했다.

“보존 처리 구역에서 원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분석 결과도 함께.”

태겸이 사진을 받아 들었다.

“공식 기록에는 어디에서 나온 물건으로 되어 있습니까?”

“아비도스.”

“실제로는요?”

유세프는 태겸을 바라보았다. 그 질문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보였다.

“그걸 알아내려던 중입니다.”

도윤이 사진 가장자리를 살폈다. 촬영번호와 축척표시는 있었지만, 유물 등록번호가 있어야 할 부분은 잘려 있었다.

“왕명이 무엇인지는 확인했습니까?”

“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왕입니까?”

유세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잘 알려진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왜 덮었죠?”

유세프는 서류철 안쪽에서 또 다른 종이를 꺼내려다가 손을 멈췄다. 그가 카림을 보았다.

카림이 먼저 물었다.

“혹시 이게 아버지 일과 관계가 있어?”

유세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망설임이 드러났다.

“물론 아버지의 기록에서 시작한 건 사실이야.”

“또 그 수첩이야?”

“그 수첩 때문에 시작했지만, 이제는 아버지 이름으로 끝날 일이 아니야.”

카림의 턱이 굳었다.

“형은 늘 그렇게 말했어.”

“이번에는 달라.”

“매번 달랐지.”

유세프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서로에게 할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아무것도 꺼내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도윤은 사진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무엇을 발견한 겁니까?”

유세프는 검은 카르투슈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저도 사라진 왕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름이 지워진 이유를 찾으면, 기록에서 빠진 어떤 왕이나 왕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검은 층 아래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그럼 무엇을 지운 겁니까?”

유세프가 눈을 들었다.

“장소입니다.”

누구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유세프는 사진을 손끝으로 돌려 카르투슈가 도윤 쪽을 향하게 했다.

“제가 발견한 건 사라진 왕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누가 그 왕을 어디서 발견했다고 쓰게 했는지입니다.”

로비의 유리문 바깥에서 전조등이 한 번 지나갔다. 유세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로를 지나던 차였다. 빛은 건물 벽을 훑고 사라졌다. 주원이 말했다.

“혹시 지금 누가 당신을 찾고 있는 겁니까?”

유세프는 잠시 침묵했다.

“내일 일곱 시 반. 박물관 서쪽 직원 출입구로 오십시오.”

“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답할 수 없습니다.”

“모르는 겁니까, 말하지 않는 겁니까?”

유세프는 주원을 바라보았다.

“둘 다입니다.”

그는 사진을 다시 서류철에 넣었다. 도윤은 손을 놓지 않으려다가 멈췄다. 유세프는 사진뿐 아니라 테이블 위에 남은 지문까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종이의 모서리를 엄지로 한 번 문질렀다.

“오늘 본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행사 사무국에도 별도의 출입 요청을 올리지 마시고요. 카림이 안내할 겁니다.”

“왜 공식 절차를 피해야 하죠?”

태겸이 물었다.

“공식 절차를 밟으면 기록이 남으니까요.”

“기록이 남는 게 문제입니까?”

유세프가 서류철을 닫았다.

“어떤 기록으로 남는지가 문제입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림도 따라 일어섰다.

“여기서 자고 가.”

“연구실로 돌아가야 해.”

“지금?”

“내일까지 끝내야 할 게 있어.”

“형, 이틀 동안 잠도 안 잤잖아.”

“한두 시간은 잤어.”

“어디서?”

유세프는 대답 없이 코트 안쪽 주머니를 확인하고 휴대전화 전원을 다시 켰다. 화면이 켜지는 순간 알림이 여러 개 연달아 나타났다. 유세프는 그중 아무것도 열어보지 않은 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도윤이 물었다.

“혼자 가도 괜찮겠습니까?”

유세프는 문 앞에서 멈췄다.

“지금은 혼자 가는 편이 낫습니다.”

그 말이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었다. 유세프는 카림과 짧게 아랍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카림의 목소리가 한 번 높아졌지만, 유세프는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을 뿐이었다. 그는 도윤 일행에게 내일 보자고 말한 뒤 유리문 밖으로 나갔다. 흰색 택시 한 대가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은 로비 안에 남아 유세프가 차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택시는 곧 도로로 나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건너편 가로수 아래에는 회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전조등도, 실내등도 켜져 있지 않았다. 운전석에 사람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택시가 교차로를 지나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세단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도로로 나왔다. 유세프의 택시가 사라진 것과 같은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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