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알았어.”
가온은 짧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손에서 힘이 들어간 탓에 휴대전화가 거의 구겨질 것 같았다. 진혁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누군데? 무슨 일 있어?”
가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 안쪽을 한 번 씹고는, 습관처럼 손톱 끝을 물어뜯었다.
“도라미라고, 형 여자친구야. 한신대 신학대학원 다니다가 형이랑 만났대. 나랑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아.”
그는 짧게 웃었지만 웃음기라고는 없는 소리였다. 진혁은 속으로 가온과 사이가 좋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다.
“형이 일주일 전에,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라고 했던 모양이더라.”
가온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형이 자기한테 따로 맡긴 게 있대. 내일 여기로 오겠다고 하더라. 와서 이야기해야겠다고.”
진혁은 괜히 목 뒤를 쓸었다. 사람을 묶어 놓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가온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면,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지나치게 냉정하고 빈틈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가온 못지않게 제멋대로인 사람이거나. 어느 쪽이든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단. 오늘 해야 할 건 하나야. 형이 남긴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푸는 거.”
가온은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화면을 켰다. 시온이 남긴 예약 메시지가 떠 있었다.
‘숭실대입구역 ESC(atom numb13) # 1 / p . ə . p . p . ə . q . w . ə’
진혁은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뒤에 저건… 암호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한데.”
“왜?”
진혁은 고개를 꺾으며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메시지의 뒷부분을 가리켰다.
“이건 뒤집어 보면 돼.”
진혁은 책상 위를 뒤져 굴러다니던 펜 하나를 집어 들어 영수증 뒷면을 펼쳐 놓고, 메시지 끝부분을 천천히 옮겨 적었다.
p . ə . p . p . ə . q . w . ə
그는 잠시 멈추더니, 종이를 돌려 거꾸로 보았다. 정확히는 뒤에서부터 짚어 나갔다.
“이걸 거꾸로 읽으면 순서가 바뀌잖아. ə, w, q, ə, p, p, ə, p.”
가온은 말없이 보고 있었다. 진혁이 펜 끝으로 하나씩 짚었다.
“이 문자들은 뒤집어 봐야 해. ə는 e, w는 m, q는 b, p는 d.”
그는 종이에 천천히 써 내려갔다. 글자를 보던 가온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embedded…”
진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 끼워 넣다. 박아 넣다. 매립하다. 그런 뜻이야.”
가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앞부분은?”
진혁은 사뭇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는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끌어다 놓고 앞쪽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숭실대입구역 ESC(atom numb13) #1…”
그는 몇 번 소리 없이 읽어 보더니 말했다.
“사실 처음엔 출구 번호인가 싶었는데, 그러기엔 좀 이상해. 출구면 보통 EXIT라고 적지, ESC라고 적진 않으니까.”
“그럼 약자라는 거야?”
진혁은 종이 위에 다시 몇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ESC
atom numb13
“atom numb13이면 원자번호 13번이라는 뜻이잖아.”
그가 펜을 잠깐 멈추고 가온을 봤다. 아무 대꾸가 없었다.
“원자번호 13번이 뭔지 알아?”
가온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진혁의 눈치를 보고는 이내 가로 저었다.
“알루미늄이야.”
진혁은 바로 이어 적었다. Al
“자, 그럼 다 나왔어. 이 말대로면 ESC에 AL이 붙지.”
그는 종이에 천천히 적었다.
ESC + AL = ESCAL
“이거는 아마도 escalator의 앞부분이야.”
가온이 메시지와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진혁도 처음엔 자신이 없었지만, 말하다 보니 그럴싸했고, 그렇기에 이번엔 확신을 갖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이렇게 읽는 게 제일 자연스러워. ‘숭실대입구역 에스컬레이터 #1.’ 그리고 뒤의 embedded는… 거기에 박아 넣었다는 뜻.”
그는 종이 아래에 문장을 다시 정리했다. 숭실대입구역 에스컬레이터 1호기 / 매립
가온이 천천히 말했다.
“숭실대입구역 에스컬레이터 1호기 밑에 숨겨뒀다라… 그 뜻이라는 거네?”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제일 말이 되지 않을까?”
진혁은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처럼 가벼운 허세가 없었다. 오히려 자기가 풀어낸 답이 맞을수록 일이 커진다는 걸 느낀 사람의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가온은 한동안 종이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뗐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꺼내느냐겠네.”
진혁이 생각한 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일이 단순하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그도 그걸 아는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몰래 뜯어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닐 텐데.”
그 말에 가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흥분한 듯 다른 종류의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충동적인 웃음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이미 몇 수 앞을 내다본 사람의 미소였다.
“나한테. 꽤 괜찮은 생각이 하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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